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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al Ending 보편적 결말

WINCEST

 

 눈을 떴을 때 샘은 도서관에 있었다. 세월에 해묵은 페이지가 금방이라도 닳아 바스라질 것 같은 오컬트 주문서 대신, 자신의 글씨로 곳곳에 시험 대비 메모가 남겨진 두꺼운 전공 책과 절전 상태로 전환된 노트북의 검은 모니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여긴?

 샘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연푸른색 바탕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황금빛 균열이 펼쳐져 있다. 저 고풍스러운 천궁도가 남아 있다는 건, 재정비 공사를 하기 직전의 스탠포드 도서관이겠군. 눈에 익은 별자리 몇 가지를 눈으로 훑었다. 2003년의 대학생 샘 윈체스터가 전력을 다해 소속되려고 했을 이 풍경이 자신에게 익숙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층 더 낯설다고 해야 할지 샘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시간이 꽤 길었던지 목 뒤쪽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알래스카의 눈밭에서 이누이트족 악령과 사투를 벌이느라 잔뜩 뻣뻣하게 긴장했던 힘줄의 느낌이 완연한데도, 목을 의자 뒤로 젖히며 한껏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장시간 앉아 공부하다가 굳은 몸을 풀어보려 하는 여느 대학생이나 다를 바 없이 보이겠지.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던 학생 몇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거꾸로 천장을 바라보는 샘의 얼굴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샘은 그들 중 가운데에 있는 제시카를 알아본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제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아직 그들은 만날 시간이 되지 않았다.

 샘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과거를 바꿔 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었다. 아직 브래디와 친해지기 전의 제시카에게 모든 것을 미리 털어놓기도, 혹은 가능한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그 우회로들은 샘이 이미 경험한 적 있는 고통보다도 더 가혹한 결말로 이어졌고, 샘은 점점 그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워져, 과거에 역효과를 가져올 만큼 커다란 변화의 시도는 차츰 단념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샘의 얼굴이 묘하게 굳는 동안 제시카가 먼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샘은 몸을 다시 일으켰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연필로 눈앞에 펼쳐진 책 한 구석에 앤지악Angiak, 이라고 끄적거려 본다. 스탠포드를 다니던 당시의 샘은 아직 맞닥뜨리지 않았던 괴물의 이름이다.

 

 

 혹독한 폭설 속에서 굶주리던 부모에게 버림받아 죽은 어린아이의 원혼이 만들어 낸 악귀, 앤지악. 이미 오랜 시간 원한밖에 남지 않은 공허한 상태로 지내 왔기 때문에 실제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악령이 되어버린 존재지만, 새파란 얼음 속에 갇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제 가족의 후손을 뜯어먹으려 덤벼드는 것을 간신히 뜯어내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못했다. 딘이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다던가, 후손의 피를 바른 송곳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것을 죽은 아이의 심장에 매몰차게 꽂아야 했던 마지막 순간에 샘은 망설였다.

 존재를 없어지게 한다 ― 죽여 버린다는 건 같을지라도, 이왕이면 마법 주문을 통해 의식을 치르자고 샘은 주장했었다. 아무리 귀신이라고 해도, 나는 눈앞에 나타난 아이를 직접 해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퇴마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은 살아 있는 가족들 쪽이었다.

 ‘이런 짓을 벌인 당신들이 떠나고 나서, 그게 또 우릴 찾아오면 어떻게 해요.’

 겁에 질린 쇳소리를 지르던 남편 때문에 주술 의식이 도중에 중단되자 동결 상태에서 반만 풀려난 앤지악을 그쪽으로 소환한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앤지악의 작고 차디찬 손아귀에 붙잡힌 샘의 손목이 날카로운 칼로 베어내듯 얼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이 그 꽁꽁 언 가슴을 차마 찌르지 못했던 것은 동상에 걸린 듯 마비된 손목 때문일 거라 샘은 애써 생각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채 얼어 죽은 아이가 왜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만 납득해 버리고, 신의 사랑을 받아 살아남은 인간들을 도리어 미워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 대신 앤지악에게 칼을 밀어 넣은 것은 딘이었다. 검고 공허한 어린 눈동자가 실제 짧은 생의 끝을 맞이할 때 그랬던 것처럼 둔중한 고통으로 뒤흔들리는 것을, 샘은 자신이 그 순금의 칼날에 찔리는 듯 눈앞에서 낱낱이 지켜보았다.

 앤지악이 얼음 조각에 뒤섞인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났는데도 샘의 손목은 온기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새파랗다 못해 새까맣게 변색되어 가는 앤지악의 손가락 자국을 들여다보며 딘은 거친 야수처럼 성을 냈다. 이러다 네 손목이 끊어져 나가겠어. 안절부절 못하는 딘의 눈빛이 조금 전의 괴물처럼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치유하는 마법도 아니까, 괜찮아, 형.’

 도리어 샘이 딘을 달래는 동안, 재투성이가 된 채 벌벌 떨고 있던 앤지악의 후손이 그들 사이에 부단히도 끼어들었다.

 ‘그 괴물 죽은 거 확실하겠죠? 다시는 우리한테 나타나지 않겠죠?’

 샘은 그쪽을 쳐다보고 싶지 않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딘이 화가 난 말투로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에 어두운 두통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눈을 감았고, 눈을 떴을 때는 이 도서관 안이었다.

마치 2003년의 샘 윈체스터가 꿈을 꾸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천궁도가 그려진 천장 아래 앉아 있는 샘은 그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현재는 끊임없이 재방문되고 있다. 그는 정말 처음으로 이 도서관에 들어왔던 진짜 2003년을 기억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형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해져서 자꾸만 그 자리에 멈춰 서던 어린 샘을 기억했다. 그는 이 시기를 오래 전에 거쳐 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곁을 스쳐 갔으며, 형과 자신은 천국과 지옥을 거쳐 이 세상의 종말을 여러 차례 막아 왔다. 심지어 다른 세상의 종말까지도.

 그들 앞에 놓이는 과제가 터무니없이 커지고, 온갖 악마와 천사들이 그들을 알아볼 정도로 분에 넘치는 거물 대접을 받으면서도, 독을 내뿜는 송곳니와 발톱에 할퀴어지면 피가 흘렀다. 소소한 헌팅에서 만나는 작고 하찮은 괴물들이 여전히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아니니까.’

언젠가 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형은 확신할 수 있구나. 샘은 어떤 의미에서는 딘이 부럽고, 답답하기도 했다.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이 열리고 시간대의 균열을 넘나들게 된 지금도, 형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샘은 거울을 볼 때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형을 볼 때마다, 그들이 몇 번째 생을 다시 살고 있는 건지 셀 수 없었다.

 종종 그들이 되돌아가게 되는 과거가 특정한 몇 시간대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샘은 반복을 통해 깨달았다. 롤플레잉 게임의 세이브 지점과도 같이, 현재 시점에서의 헌팅 도중 문제가 생겼을 때나 현재 그들이 속해 있는 세상에 치명적인 위험이나 균열이 발생하면 샘은 곧잘 이 도서관에서 깨어나곤 했다. 때로는 조금 더 이후, 그들이 잊을 수 없게 재회했던 2005년 할로윈 다음날, 흰 옷을 입은 콘스탄스 웰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제리코의 도서관이기도 했다. 혹은 그보다 더 이후, 형과 본격적으로 헌팅을 시작하던 때거나. 아무튼 회전축이 되는 지점은 공공 도서관이라는 장소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식의 사람들’의 후예들로서 상속받게 된, 벙커 내부의 사적인 서재를 갖춘 이후부터의 시간대는 상대적으로 드문 회귀점에 속했다.

 과거를 다시 살아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샘은 잘 몰랐다. 그 어느 변덕스러운 신의, 천사의, 악마의 장난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이 특별한 재방문 제도가 그들의 노골적인 초자연성을 더해 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 가끔 생각했다.

 다른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샘도 이미 주술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다양한 시간대를 이동했다. 각자 다른 속도의 시간이 흘러가는 우주를 징검다리처럼 건너가며, 시간대의 교차로와 지름길을 거쳐 ‘먼 미래의, 진짜 현재 시점’을 찾아다녔다. 딘과 함께 있으면서,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르는 바로 그 순수한 현재의 지점 말이다. 그러나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시간은 곧 여러 슬롯의 시간대를 점령했다. 샘은 더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딘이 저 멀리 존재하듯,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샘도 무한한 수로 존재할 수 있다고 느꼈다. 샘은 자신의 기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자신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경계선이 시간의 무작위한 파도에 무너지지 않도록, 천체의 복잡한 궤도처럼 여러 세계를 한꺼번에 통과해 가는 스스로의 동선과 지도를 기억해 내야 했다.

 

 

 조금 전까지 알래스카에서 딘과 함께 앤지악을 헌팅하고 있었던 샘은, 2003년의 도서관에서 노트북 화면을 켜고 이메일에 접속한다. 로그인 창에 자동으로 뜬 아이디 아래 암호를 입력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샘이 사랑하던 어린 형과, 그 형을 떠나 온 날짜를 조합한 날짜다.

 기숙사에서 나와 제시카와 동거를 시작하던 날 밤, 몇 개 안 되는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서 과제 메일을 열어보던 그는 문득 충동적인 기분에 젖어 암호를 바꾸었다. 그 학교 계정에 더는 접속하지 않게 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암호는 그 팔로알토 집의 번지수였다. 샘은 이런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과거 당시에는 잊어버렸던 것들도 더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샘은 수신자 칸에 미래의 자신이 만들어 둔 계정을 입력한다. 그 로그는 구심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다차원 여행자의 일기 같은 것이다. 앤지악 헌팅에 대한 내용과, 어떤 무기가 유용했는지 쓴다. 딘이 어딘가에서 읽었다던 것처럼, 앤지악 후손의 피를 바른 송곳이 효과가 있었다. 어린아이 형태를 한 악령을 근거리에서 공격하는 데 따르는 불편한 감정과 정신적 충격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앤지악에게 붙들려 직접 피부 접촉을 하게 되면 해당 부위가 급속 동상에 걸린 것처럼 고통이 따를 테니 주의가 필요하다. 심한 경우에 따라서는 단시간 내에 괴사가 진행되어 사지가 절단되거나, 사망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쓰던 샘은 타이핑을 중단하고 꺼림칙한 표정으로 손목을 한 차례 돌렸다.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거지.

 

 

 샘 역시 가끔은 딘이 없는 세계에 들어갈 때가 있었다. 샘으로서는 이미 골백번이 넘도록 지겹게 겪어 본 세계였다. 하지만 트릭스터의 천박한 장난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형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솔하게 찔러 넣은 주사 바늘, 알약, 주술 표식 같은 것들이 예정되어 있던 궤도의 원을 완성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내리고 마는, 엉뚱하게 맞물리지 않는 곳들이. 형이 직접 만들고 스스로 봉인해 버린 그 빌어먹을 상자를, 그 어느 해저에서도 샘이 영영 찾아내지 못했다던가.

 나는 형을 믿어. 난 우리를 믿어.

 이 말을 왜 처음부터 하지 못했을까. 간신히 시간을 거슬러 그 상자에 들어가기 직전의 형을 다시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이렇게 그를 붙잡고 화를 낼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놓쳐 버린 시간이 마음에 사무쳤다. 형은 몰랐지? 형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내가 한참이나 형을 찾아다녔던 시간이 또 있었다는 걸.

 샘과 딘 윈체스터가 구해 내지 못해서 닫혀 버린 세계들을 방문하는 것은 샘을 괴롭게 했다. 그런 세계는 음울한 빛깔의 필터를 씌운 것처럼 살짝 채도가 낮은 상태였기에 도착하는 즉시 곧장 알 수 있다. 그럴 때면 샘은 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다녔다. 샘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딘이 남겼을 게 분명한 기록을 통해 그들이 함께했던 최후의 헌팅, 만남, 거기서 결정적으로 뒤틀린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가장 근접한 좌표를 찾아내 재이동하여 다른 시간의 갈래를 만들었다.

 우주는 잘디잔 누더기 같은 세계가 모여 이루는, 거대한 모자이크 구조물의 모습일 거야. 샘은 가끔 낙서를 하듯 빈 종이에 그 모습을 그렸다. 동그마니 떨어진 점 하나로 시작했다가 혈관처럼 퍼져 나가는 무수한 벌집들. 척이 제 거실에 걸어 둔 예술 작품쯤 될까. 샘은 고개를 저으며 이미 충분히 짙은 덩어리가 되어 가는 낙서를 더 새카맣게 칠했다. 아니, 이 우주는 그 자체로 신이야. 척도 척의 거실도, 잘해봤자 여기쯤에 있는 관상동맥 정도겠지.

 척이 그 말을 듣고 코웃음 치며 그날 오후 당장 샘을 자신의 거실로 불러들여 자신의 컬렉션을 과시한다 해도, 샘은 짐짓 우기고 싶었다. 무자비한 땅꼬마 신과, 습기 찬 나무 냄새가 나는 그의 거실 겸 서재와, 자아도취적 예술가의 자서전만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선반을 넘어서는, 보다 위대하고 복잡하며 무심한 우주가 있을 거라고.

 미래에 쓰는 메일 계정이 폭파되었을 경우의 우주에 대비해서, 샘은 두 가지 방법으로 기록을 남겼다.

(1) 자기 자신의 메일 계정으로 보내는 비교적 상세한 헌팅 일지와, (2) 이름과 장소와 사건들을 조금씩 바꿔 온라인상에 뿌리는 가상의 이야기였다. 샘이 이용하는 포럼 사이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그가 쓰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두 인물이 그들 앞에 닥친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거나 가족이었지만, 한 번은 아예 다람쥐로 등장하는 동화를 쓴 적도 있었다.

 밤비Bambi라는 순록을 타고 겨울 산에 등장한 디쿼럴Deequirrel과 샘멍크Sammunk가 북풍의 신을 무찌르고 빼앗긴 도토리를 되찾아서 마침내 고향 숲으로 되돌아간다는, 우습고 귀여우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써서 올렸을 때 샘은 반쯤 장난이었다. 정말로 북풍의 신에게서 개암나무 지팡이로 흠씬 얻어맞은 다리를 치료해야 하는데, 그들이 진통제 대신 털어 삼키던 위스키마저 하필 그날따라 똑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들이마신 대마초 한 개비에 한껏 취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얘기는 생각보다 더 인기리에, 광범위하게, 다양한 미디어를 거치며 퍼졌다. ‘지금 가장 핫한 인터넷 밈’으로 꼽히는 디쿼럴과 샘멍크를 공식 라이센스 캐릭터로 만들어도 되는지 방송사의 문의 메일을 받았을 때쯤, 샘은 다음 우주로 이동했다.

 

 

 ‘네 짓이야?’

 벙커 지하실에 나란히 드러누워 TV 채널을 돌리다가 ‘딘쿼럴Deanquirrel’과 ‘새무스Sammoose’가 인형 탈을 쓰고 등장하는 어린이 방송을 보던 딘이 힐끔 샘에게 눈길을 던졌었다. 뭔가 조금, 내가 썼던 버전과 달라지긴 했네. 샘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감돌았다. 저런 별명으로 우릴 부르던 자가 또 있긴 있었지.

 ‘설마, 크라울리가 예전에 저질러 둔 장난질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겠지. 형을 존나 좋아했잖아. 지옥의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똘마니 하던 시절엔 형 상사이기도 했고.’

 ‘또 시작이네. 똘마니라니. 네 형은 비록 악마가 되었을 때도 지옥의 왕이랑 맞먹는 급이었거든. 그리고 정작 크라울리 그놈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진심을 털어 놓은 상대는 내가 아니라 너였어.’

둘은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하다 묘하게 입을 다물었다. 지옥 전체를 지배하던 무시무시한 악마에게 인간화의 고문을 자행했던 인간, 본인의 육신과 영혼 모두를 간직한 채 악마 그 자체가 되었던 인간 형제 둘이서 그 초자연적인 경험을 두고 더없이 태평한 농담을 하는 것만큼 우습게 느껴지는 일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악마나 지옥과의 인연은 형보다 내가 더 깊긴 하지. 샘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천사들이 가장 탐내는 인형들이기도 하고, 우린.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만큼 좁은 세계라니. 무한대로 펼쳐져 있던 천장의 별자리들이 삽시간에 점 하나로 줄어드는 느낌이다. 시간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샘은 가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게 여러 시간대를 거쳐 다니느라 생겨난 더없이 물리적인 육신의 반응인지, 아니면 그 무수한 교차로 어디에선가 이미 무거운 죽음을 맞이하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샘의 사념 속 마지막 숨결의 흔적인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누기에는 그 안의 공기도 자리도 빠듯하기만 하던 임팔라 안에서 거의 일평생을 보냈는데, 새삼 폐소 공포증이 생겼을 리도 없고. 그러나 증상 자체는 딱 그랬다. 이 세계가 사실 한 줌의 모래알처럼 작고 작은 곳이라서, 그 안에 든 샘이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 임팔라는 그 반대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주보다도 더 컸다. 루시퍼의 케이지 안에서 지내는 동안 샘은 줄곧 그 영겁과 싸우기 위해 임팔라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안의 딘을.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하면 이상한 걸까?’

 딘이 조금 멋쩍다는 듯이 물었다. 결혼 몇 주년째를 맞고 있는 친밀하고 익숙한 부부가, 애틋한 연애 시절을 추억하는 듯한 말투였다. 샘은 당연히 그 시절이 그리웠다. 딘이 생각한 의미와는 분명 다를 테지만. 그때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마지막 모래알까지 놓치지 않고 헤아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소중한 것들을 온전히 바치고, 깨끗하게 정화된 세상을 남긴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딘의 간절한 설득을 듣지 않고, 딘의 어깨에 기대 버리지 않고, 어리석고 슬픈 미련을 내비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누더기처럼 얽히고설킨 은유들로 가득한 우주가 아니라 처음과 끝이 분명히 존재하는, 첫 표지와 마지막 페이지가 있는, 단 한 권의 얇고 정갈한 책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샘은 그렇지 못했다.

 

 

 샘은 언제나 돌아왔다. 그를 다시 제 곁에 두기 위해 딘이 갖은 억지 수단을 부리긴 했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도, 그에게 의식적인 선택권이 있었다면 결국 그는 돌아갔을 것이다. 온전한 희생과 대속의 성스러운 기회를 박차고, 어딘가 고칠 수 없이 망가져 있는 딘에게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 그들의 세상으로, 천국마저 그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던 그 버려진 교회 안으로.

 샘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언제나 저주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선택이 자신의 본질을 정의해 준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는 어서 앞으로 나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거대한 설계자들의 요구에 끝내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 모든 저항이 결국 부질없는 시도였음을 인정하라는 속삭임이, 언제나 그의 귓가를 깃털처럼 부드럽게 휘젓고 있었다. 신도, 사탄도, 그리고 딘도, 모두가 그의 굴복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나와 함께 있자. 그들 모두 저마다의 욕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샘은 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영영 기대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점도 찍히지 않은 새하얀 백지가 되고 싶었다. 절대 이루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괴로워하겠지. 그러나 그 중에서 반드시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별들이 어지럽게 맞물리는 우주를 꼭 하나만 그려내야 한다면, 샘이 누굴 선택할지는 당연한 결과였다.

 딘은 운명의 설계자 따위가 아니니까. 가장 평범하고 사소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없이 얼룩진 삶에 내던져진, 나랑 가장 닮은 모습의 사람이니까.

 오래 전 할로윈 밤, 푸른 어둠 속에서 반짝 웃던 딘을 샘은 기억했다. 형은 언제나처럼 그 대단한 아빠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과장된 엄살을 부리며 샘을 데리러 왔었다. 하지만 나는 운명에 못 이겨 형에게 끌려간 게 아니야. 샘은 이후 몇 번이고 생각했다. 딘은 나를 설득하는 동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구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겠지만 나는 사실 그보다 우리 스스로를 구하려고 했어. 베이비와 함께 먼지 나는 길을 쏘다니면서 이 세상에 난 작은 주름들이나마 두들겨 펴내는 땜장이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둘 다 이 세상이 외롭고 공허해서 어쩔 줄 몰랐을 테니까.

 우리는 위대한 인물들이 되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서로와 함께 있고 싶어서 길을 떠났던 거지. 영원히 움직일 것만 같은 그 차를 타고.

 

 

 샘은 팔로알토의 그 집에서 제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세계에 딱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꽤 오랜만에 만난 형은 그와의 작별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샘은 이미 오래 전에 힘들게 빠져 나온 그 감정의 터널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아빠 찾으면 연락 줘.’ 어색하게 배웅을 마치고 돌아오자 샤워를 마친 제스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막 구운 쿠키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한밤을 찢는 사이렌을 울리며 소방차가 출동하는 일 같은 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샘은 월요일 로스쿨 면접에 당연하게 합격했고, 졸업할 때쯤 제스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몇 년 째 연락이 두절되어 있던 아빠와 형은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아빠보다 딘에게 더 화가 났다. 내가 필요할 때 날 찾아왔으면서, 왜 내 쪽에서 필요할 때는 내 곁에 없어? 가족 좋아하시네.

샘과 제스 둘 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에 결혼 이후 생활 자체에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로펌 업계에서 샘이 남다른 유명세와 고액의 수임료를 쌓는 동안 제스는 장인이 하던 식품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7년간을 바쁘고 다정하고 화려한 부부로 지냈고, 별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이혼했다.

 ‘자기랑 나는 굳이 결혼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제스의 확고한 진술에 샘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샘 본인이 CEO로 취임한 신규 로펌을 경영하고, 강연을 다니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그 세계가 종결되었더라. 2015년의 실리콘 밸리 사무실에서 2005년의 이스턴 아이오와 대학 도서관으로 되돌아온 샘은, 평소와 다르게 그 이전 세계의 기록을 잘 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헌팅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히 그 삶의 어느 부분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스도 살아 있고, 샘은 변호사가 되었다. 그것도 매우 성공한. 10년이 넘게 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세계에서 샘은 딘을 별로 그리워하지도 걱정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 샘 윈체스터란 이름을 단 칼럼들이 제법 규모 있는 일간지 여러 군데 실렸으니 형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다면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같았다. 스탠포드에서 보낸 마지막 할로윈 밤에 갑자기 나타난 딘을 따라 제리코까지 다녀와야 했던 일도 흰 옷의 유령 때문이 아니라 실종된 아빠의 행적 조사를 같이 해 보자는 거였다. 엄마의 지병 때문에 별 의사를 다 찾아다녔지만, 결국 수술대 위에서 엄마를 잃고 나서 허탈감에 시달리던 아빠는 툭하면 집을 비우곤 했다. 평범한 불행에 긁혀나간 가정사였으나 샘도 딘도 성인이었다. 샘은 딘이 감정을 누른 채 수동적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불편했다.

 초자연적인 것들이 아예 없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샘은 곱씹어 생각했다. 그럼 그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 시간대 중에는, 내가 지옥의 모든 악귀들을 봉인하는 시험을 끝까지 완수해 낸 세계도 있을 거라는 결론이 되잖아. 기대와는 다르게, 샘은 기묘한 자기의심과 불쾌감에 휩싸였다. 왜지? 그 세계만큼은 다시는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일지를 쓰지 못한 대신에 샘은 짧은 공포 소설 줄거리의 형식을 빌어 그 세계를 기록했다. 어딘가 음침하고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꽉 닫힌 세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고독한 남자가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 난다.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동사할 위기에 처하는 동안, 지옥에서 온 악령이 자꾸만 그의 꿈을 깨뜨린다. 공포에 지친 남자가 그 방에서 뛰쳐나오자마자 흰 성에가 낀 채로 얼어 있던 눈꺼풀이 녹아 열리고, 진주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진다. 다음 순간 남자는 자신이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악령이 지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그를 전율하게 한다. 눈을 다시 감으며 남자는 행복하다.

 샘이 아직 가지 못한 어느 우주에는, 베스트셀러 스릴러 저자 새뮤얼 웨슨의 주목받는 신작 사인회에 참석한, 샌도버 증권사의 신입 사원 딘 스미스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번호표를 지닌 데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장시간을 기다린 탓에 더욱 목을 조여드는 넥타이를 끄르면서 정말 오... 오랫동안 당신의 팬이었다고 힘겹게 중얼거리는 딘이겠지. 혹시 괜찮으시면, 5분 후에 서점 안쪽 카페에서 볼까요? 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뻔뻔한 멘트를 사인 아래 과감히 적어 넣었고, 책을 받아들고 나서 녹색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피식 웃는 딘의 미소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카페 안에서 아직 그 소설을 쓰고 있는 샘이라면 어떨까. 낮에는 바리스타, 밤에는 바텐더인 로키스 카페 앤 바Rocky’s Cafe & Bar의 딘 스미스는 핫하게 예쁜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냉담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 검정 터틀넥 차림으로 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큰 몸집의 손님을 언젠가부터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가 테이블에 내려두던 커피를 조금 쏟았을 때, 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 달려가 섰다.

 ‘맞춰 볼게요. 소설 쓰고 있죠?’

 ‘어떻게 알았어요? 화면도 꺼져 있는데.’

 ‘독립 서점이 늘어선 거리잖아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작가가 아닌 사람을 더 찾기 힘들 거라고요.’

 결국 그 세계의 샘은 그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과거에 놓친 것들로 꾸려진 일종의 환상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 온 동생과 함께 신비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는 장편을 썼다. 딘과 동거를 시작한 지 1년 3개월 만에 전체 탈고를 앞두게 된 작업이었다.

 ‘난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노트북을 펼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샘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 세계의 딘이 말했다. 이제 막 퇴근한 딘의 팔에서는 하루 종일 짙게 내려앉은 커피와 위스키 향이 느껴졌다.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게 되는 것보다, 그냥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편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더 행복했을 수도 있지.’

 샘은 아직도 이야기의 결말 처리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거기엔 동생이 없었잖아. 새미 네 이야기도 없고.’

 ‘내 이야기는……. 마감이 닥치면 나오게 되어 있어.’

 샘은 장난기가 담긴 어조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스쳐가는 눈동자로 벽에 걸린 달력과 일정을 힐끗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면, 순서가 돌아오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그 어떤 이야기도 결국에는 끝이 나게 되어 있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끝.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모험담을 쓰는 사람치고는, 행복의 정의를 굉장히 소극적으로 내리는구나.’

 ‘난 지금 너랑 있는 게 행복해.’

 샘은 고개를 돌려 딘을 마주 안았다.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샘의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음표들이 조화로운 악장으로 연주될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단 하나의 깊은 울림이었다.

 ‘이게 환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고?’

 딘의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떨리는 몸을 통해 전해져 왔다.

 

 

 샘은 천장을 다시 올려다봤다. 별들이 촘촘히 이어진 푸른 바탕의 천궁도. 이 우주와 또 다른 우주. 내가 살 았던 세계들과, 내가 가보지 못한 무수한 세계들. 나는 언제나 형과 떠났던 그 길을 다시 찾아갈 거야. 샘은 임팔라의 보닛 위에서 딘과 함께 바라보던 별자리들을 더듬었다. 도서관의 모든 책갈피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고개를 내밀 때까지. 우주의 먼지들로 이루어진 모든 혈관, 신경, 근육, 골수가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의 이야기로 빚어지고 덧칠된 새로운 존재가 첫 숨결을 내쉬게 되면, 그가 몸을 일으켜 떠나고 난 빈 정원에서 우리도 비로소 안식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겠지.

 샘은 앤지악을 헌팅한 이야기를 가상의 판결문 형식으로 바꾸었다. 그건 어느 방임하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저 심심풀이로, 파트너와의 관계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느라, 귀여운 아기 인형으로 소꿉놀이를 해 보고 싶어서, 아이를 낳고 나서는 제대로 돌보지 못해 유기한 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이는 기적적인 구조를 통해 살아남았지만 신체 내부에 불치의 후유증이 남았고, 그로 인해 죽기 전까지 반드시 부모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어느 주말 평화로운 주택가 바비큐 파티에 권총을 들고 난입한 고아는 이웃 손님들을 인질로 삼아 경찰과 대치했다. 마지막 순간에 아이의 총구는 제 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향했으나, 때마침 식탁 아래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대신 이웃 여럿이 총탄을 맞았다. 아이는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바비큐 파티 살인범’이 사실 그 주최 가족의 친자녀였다는, 뜻밖의 유전자 검사 결과와 충격적인 사연이 드러나자, 부모는 십여 년 전의 영아 유기죄 형사 처분을 받게 된다는 얘기였다.

 세부적인 문장들 사이사이에 자신과 딘만 알아볼 수 있는 헌터들의 암호와 장치들을 메모처럼 섞어 넣으며, 샘은 앤지악 헌팅이 그들에게 남긴 지식들과 정보들을 제법 그럴듯한 가상의 사건으로 재구성했다. 알래스카, 버림받은 아이의 악령, 피를 바른 칼, 신체 접촉 주의.

 형, 우리 앤지악 헌팅 때 마지막으로 봤지? 이 시간대의 좌표를 남길 테니 참고해.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전 지점으로 복원해서 거슬러 와.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것과 같은 샘의 메모를, 딘이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헌터가 아니라도 충분히 익숙한 이야기였다. 샘은 건조하고 명확한 문체 속에 분노와 슬픔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전능하고 무책임한 창조주와, 버려진 고아가 되어 다가올 모든 세상과 싸워 나가는 창조물. 자신이 새롭게 덧입혀 낸 이야기인데도, 눈을 감으면 총격전의 피로 물든 잔디밭이 생생하게 보였다. 아름다운 그 정원을 단 한 번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은 자유 속에 더없이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게.

 

 

 완성한 원고를 업로드한 뒤에 노트북을 닫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의 한 점에 샘은 문득 시선을 고정했다. 따스한 햇살에 흠뻑 젖은 교정의 한적한 길가 구석에 숨겨둔 비밀 코드처럼 주차되어 있는, 날렵한 검정 임팔라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샘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그와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저마다의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이 평범한 여름 오후에 녹아들어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본다. 당연히 거기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천궁도의 금빛 가루처럼 반짝이는 나무 그늘 아래, 아빠의 묵직한 가죽 재킷을 걸치고 하염없이 도서관 정문을 응시하고 있는 스물 네 살의 딘이.

 샘은 그 딘이 지금의 자신처럼,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축을 기점으로 2003년을 재방문한 게 아니라, 정말로 이 시간대를 처음으로 살고 있는 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혹시라도 2003년의 샘과 정말로 마주치게 될까봐 그늘 속에 조심스레 반쯤 몸을 숨기고 있을 리가 없겠지. 이때 우리는 서로 만나지도 전화도 하지 않는 사이였으니까. 다시는 서로와 함께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형이 이렇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도, 아빠가 널 걱정해서 보냈던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빠가 보내지 않았을 때 더 많이 샘을 찾아왔었다는 것도, 지금의 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샘은 당장 도서관 정문을 나가서 곧장 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혼란과 순수가 가득한 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괜찮아 형, 나는 이제 형을 용서했어.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용서를? 네가 나를?

 딘은 어색하게 웃겠지. 지금의 그는 자신을 두고 떠나간 샘을 그리워하다 못해 미워하고 있을 테니까.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샘이 거꾸로 꽤나 뻔뻔한 소리를 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진짜로, 괜찮아, 딘. 투명하게 부서져 내린 그 마음의 조각들이 햇살 아래 더없이 밝고 여린 색채로 드러나는 게 사뭇 애틋해서, 샘은 조금 가슴 아프게 웃는다. 그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돼 버릴 거야.

 형은 아직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함께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전부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천국과 지옥에 다녀올 거고, 수백 번이나 헤어졌다 다시 만날 거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몇 번이고 뛰어넘을 거야. 믿어져? 우리는 악마들을, 천사들을, 우리와 그들 모두를 만든 신을 상대로 싸우고 있어. 이제 그 어떤 존재에도 굴복하거나 기도할 필요 없어. 우리는 온 우주의 이야기들을 다시 써서라도, 그 어떤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반드시 서로를 찾아내고 말 거야.

 -넌 네가 새로운 신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새미.

 상상 속의 딘이 말했다. ‘퉁퉁한 12살에게나 어울리는 호칭’이라고 샘이 종종 싫은 티를 내곤 하던 애칭을 일부러 덧붙인 건, 그렇게 해서라도 샘 앞에서 형다운 태도를 애써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얼굴은 말간 19살의 샘 그대로인데도, 어쩐지 이 샘은 단호하고 원숙해 보이는 게 이상했다. 정말 황당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그의 말 그대로, 진짜 시간을 거슬러 다시 이곳에 온, 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샘 같았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 전부와 함께 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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