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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N

 

 흐리군.

 

 문 앞 계단에 걸터앉은 카스티엘이 무려 고개를 드는 노력까지 보이면서 올려다본 하늘이었지만, 그 감상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별은커녕 바로 앞에 있는 산까지 내려앉을 듯 묵직한 먹구름이 하늘을 두텁게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낮에도 밝은 태양이 보이지 않는 날들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종말의 시작에서부터 시간은 꽤 지나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캠프 치타콰에 자리를 잡고 진창을 기어 다니던 날들도 더는 그렇게 낯선 경험이 아니게 되었단 소리다. 작전 회의실 한쪽에 걸려있는 낡은 달력의 날짜가 한 달, 석 달, 일 년 넘게 넘어가면서 지구의 인간들은 생존이란 단어가 피부로 와닿을 만큼 변해버린 일상에, 장소가 안전치 못하면 자다가도 총을 쏴야 할지 모르는 세상에 더는 불만을 건의하지 않았다. 불만을 내뱉을 여유를 가지기에는 이 멋진 세상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존재들이 지구를 삽시간에 덮어버렸다. 무력한 인간들은 화를 내는 대신 그 존재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총과 칼을 들었다. 물론 살아남는 와중에 서로를 챙기는 아름다운 격식을 차리기란 불가능했고 자연스럽게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기에 죽어 나가는 인간들도 어지간히 불어났다. 그 시신들을 손수 땅에 묻는 것은 생존자들의 시간과 체력을 단숨에 빼앗아가는 아주 진부한 방법이었고 그렇다고 땅바닥에 버려놓는 건 그들의 마음이 내켜 하지 않았다. 때문에 캠프의 사람들은 헌터식 장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특정한 주기로, 특정한 냄새와 특정한 소리가 캠프와 그 근처 숲속을 얕게 채우는 모습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게 되었다. 카스티엘이 굳이 의도적으로 폐와 근육을 사용해 냄새를 맡으려 하지 않아도 공기를 가득 채우는 텁텁한, 검은 재가 함께 날리는 연기가 코끝 주변을 떠돌았다. 카스티엘은 그 냄새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캠프의 다른 생존자들은 이 냄새와 이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퉁이 너머에서는 곧잘 어떤, 우는 소리가 잘 들렸다.

 

 카스티엘이 앉아있는 오두막 모퉁이를 돌아 바로 보이는 불길은 타닥, 탁, 거슬리지 않을 만큼의 소리를 내며 캠프 구석을 성심껏 채우고 있었다. 그의 크나큰 오두막은 캠프를 가장 벗어난, 탁 트인 공터 근처와 돌길의 바로 옆에 우뚝 자리 잡고 있어 여러모로 편하단 이유로 으레 무언가를 태우거나 처리하기 편한 장소로 취급받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불을 크게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카스티엘은 구태여 계단에서 일어나 열 걸음 정도도 되지 않는 발자국을 옮겨, 모퉁이 너머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너머에선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흐느낌이 조금 더 커진 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카스티엘은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까지 먹었다.

 

 물론 카스티엘이 그 자리에 무조건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얼굴을 알았던 이가, 몇 마디라도 나눠봤던 사람이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걸 매번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으며, 아마 그가 가지 않았어도 남겨진 자들의 울음소리는 곧 잦아지고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또 한데 모여 더는 이 지구에는 없는 신을, 아니면 이제 존재의 유무마저 불확실한 다른 신들을 향해 기도할 것이었다.

그 무리에 자신 같은 별종이 참가한다고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오히려 환영받을 일일지도 몰랐지만 카스티엘은 어설픈 위로라도 하러 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간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더더욱 없었다. 캠프의 생존자들은 카스티엘이 천사‘였던’ 것을 듣고 알았지만 그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사실은 그들의 이유 없는 희망에 불을 더 지펴주기만 할 뿐이었다.

 

 카스티엘은 인간이었기에 더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어주지도, 도와주지도 못했다. 그는 작은 애도의 말을 하는 것이 능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카스티엘은 이런 날이 오면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계속 앉아있기만 했다. 그냥, 모퉁이 너머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그 오두막 계단에서 앉아만 있다 빛이 들 새벽에서야 안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일찍 들어가기는 글렀군. 의미 없이 몇십 분 들고 있던 고개를 바로 하자 금세 앓는 소리가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질적인 그 소리에 새삼스레 퍼뜩 놀라 제 목을 가볍게 움켜쥐자니 갑자기 드리운 그늘과 함께 딱딱한 게 신발에 툭툭, 닿았다. 정적 속을 파고드는 존재가 달갑지 않아 답례로 나오는 소리가 영 듣기 좋지 않게 나갈 수도 있었지만, 카스티엘은 호의를 베풀어 소리를 내는 대신 입꼬리만 올려 웃어주었다. 오늘 같은 우울한 밤에도 슬픔에 취하지 않고 특별할 것 없이 오두막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든 있었다. 보통 그들은 카스티엘이 온갖 잡념에 잠길 시간을 가져가 주는 괜찮은 인간들이었으므로 카스티엘은 구태여 그들의 걸음을 막지 않았다.

 

 “빌! 오, 이 누추한 곳까지. 즐길 거리라도 필요해?”

 “오늘은 아니거든.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초저녁부터 동하지는 않아.”

 “그럼 내일 아침에 봐.”

 “그랬다가 정찰에 늦으면 나만 싫은 소리 들으라고?”

 “거절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너도 할 일은 없어서 이쪽으로 온 거잖아.”

 

 캠프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스티엘의 길다한 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그의 앞에 있는 남성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재미라도 볼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찾아왔던 거라면 웬일로 카스티엘의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었겠지만 그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는지 카스티엘의 말에 더는 입을 벌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계단 옆에서 작게 한숨을 쉬고 뒤통수를 긁적이기만 했다. 눈치 좋은 카스티엘이 추측해 보건대, 아마 빌도 모퉁이 너머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넘어온 것일 것이다.

 

 캠프에는 빌 같은, 여럿의 안전에 목멜 바에야 제 안위만 챙기면 된다는 자들도 꽤 많았다. 카스티엘이 존경하기 마지않는 지도자는 그 무서운 얼굴과는 달리 마음이 꽤 여려서 눈에 보이는, 길가에서 살아남기 급급한 인간들을 잘도 주워왔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로 헌터와 그들의 가족뿐이었던 캠프가 곧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곳으로 변해갔다. 딘 윈체스터는 정말, 닥치는 대로 생존자들을 끌어모았다. 그게 정말 동정심과 넓은 아량 때문인지, 아니면 되찾을 수 있을지조차도 말할 수 없는 그의 동생, 샘 윈체스터가 돌아왔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카스티엘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딘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부 끌어모았다. 그 후의 인력 배치라던지, 식량을 나누는 일 같은 건 딘도, 카스티엘도 알 바는 아니었다. 다만 물품 담당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척이 늘어난 인원수를 확인하고 뱉어내는 단말마만 캠프의 창고를 채워나갔다.

 

 슬슬 불청객은 쫓아내야지, 하고 생각하며 카스티엘은 이미 뻐근해진 고개를 할 수 있는 만큼 꺾어 올려 빌을 올려보았다. 정확히는, 시선 끝은 모퉁이 너머 바닥을 밝히는 불빛에 가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마 자신이 어디를 보는지에 커다란 관심은 없을 것이다.

 

 “왜. 지금 하고 싶어? 소리가 방음이 잘 안 될 텐데 괜찮으면. 아, 아까 보니까 네가 작업하던 자매님도 있던데. 저기에.”

 

 카스티엘은 눈을 한 번 크게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소리가 들리든 말든 카스티엘은 상관도 하지 않을 테고 들린다고 초를 치러 들어올 사람 따위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빌은 어떤 부분이든 카스티엘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를 흘겨보다 금방 모퉁이를 돌아 가버렸다.

싱겁긴. 카스티엘은 굳이 소리를 죽이지 않고 웃으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카스티엘은 정확히 다음 날 새벽 6시에 오두막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날이 밝아 오두막 밖이 조금은 시끄러워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창틀 위로 떠다니는 먼지를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갔고, 잠은 후에 자면 되었다. 그는 저녁에 있을 정찰 전 아주 조금만 자면 됐다. 그걸 위한 잠이 아니라면 그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자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바닥에 앉아 온몸이 뻐근하다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귀가 오직 숨소리만을 알아듣고 지겨워할 지경이 되어서야 오두막 문 앞 나무 바닥에 쿵쿵, 발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곧 귓가를 파고드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도 들렸다. 카스티엘은 조금의 시간을 들여 그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삐거덕대는 몸을 무시하고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카스티엘!”

 “음, 잠시만... 좋아,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셈이지?”

 “그게 캐스 이름이잖아요.”

 “캐스가 내 이름이야, 엘리.”

 

 느려빠진 손짓으로 문을 다 열기도 전에 불쑥 들어온 작은 손이 카스티엘을 이끌고 나왔다. 엘리는 키가 작은, 갈색 머리카락에 앞머리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그는 딘과 바비가 캠프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모친과 함께 합류한 사람으로 카스티엘이 조금 더 ‘천사 같았던’ 시절부터 그에게 살갑게 대했다. 당연히 그가 아직 쥐꼬리만큼 남았던 은총을 가지고 있었던 때도 알고 있었다. 엘리에게 카스티엘은 생존자이기 이전에 친구이자 천사라고 취급되고는 했다. 물론 이제는 천사가 아닌 카스티엘은 그걸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몸을 비틀거리며 엘리의 손에 끌려 나온 카스티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오두막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엘리는 히히 웃으며 그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카스티엘이 엄청난 순발력으로 그가 앉기 직전에 계단에 굴러다니던 모래들을 치운 덕분에 그의 금방 빤 것만 같은 옷에 자질구레한 먼지 덩이가 묻는 일은 없었다. 묻었다 해도 그가 그걸 신경 쓰지는 않을 거란 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카스티엘은 그렇게 했다. 엘리는 앉기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마 캠프의 누군가가 몰래 숨겨두었던 간식거리라도 손에 쥐여준 모양이었다.

 

 “카스티엘, 오늘은 어제보다 구름이 적은 것 같아요.”

 “그러게.”

 “이런 날이면 새들이 엄청나게 날아다니지 않을까요? 비행기처럼, 슈웅!”

 “아하, 오늘 그런 꿈을 꿨나?”

 

 엘리는 꼭 일주일에 한 번은 넘게 오두막에 들리고는 했다. 그렇다고 항상 카스티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엘리는 꼬박꼬박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어쩌다 운 좋게 엘리가 카스티엘을 보는 날이면 카스티엘은 그늘진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면 엘리가 그 바로 옆에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달고 앉는 것이다. 둘은 하는 것도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카스티엘은 엘리가 귀찮을지언정 그를 쫓아내진 않았다. 엘리는 카스티엘에게 어떤 것들도 바라지 않는 꽤 특이한 상대였으므로 쫓아낼 이유가 없었다. 카스티엘은 어쩌면 이 시간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는 다리와 발을 움직여 바닥에 있는 흙들을 신발 사이에 모았다가 다시 평평하게 바닥에 신발 밑창을 문지르는 걸 반복하다가 곧 싫증이 났는지 한숨을 폭 쉬었다. 곧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으려는 동그란 눈동자 두 개가 카스티엘의 관자놀이에 꽂혔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걸 보니 금방 일어날 것도 같았다.

 

 “캐스. 카스티엘은 왜 아무것도 안 해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에이, 거짓말!”

 

 카스티엘의 예상이 현실이 되듯 엘리가 일어나 말도 안 된다며 혀를 내밀고는 계단 아래의 흙바닥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어차피 계단은 한 칸밖에 되지 않았지만 카스티엘은 꼭 그가 널따란 징검다리를 건너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뒤돌아서 자랑스럽게 웃던 엘리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봤다.

 

 “카스티엘은 어른이잖아요! 찬장에도 손이 닿는데?”

 “손이 닿을 필요가 있나. 찬장 위에 크로츠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뭐라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럼, 할 수 있지. 운전 같은 것도. 카스티엘이 무릎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 답해주자니 바란 대답이 아니었는지 엘리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엘리는 착하게도 다른 대답을 무려 30초나 더 기다려주다 반대로 저에게 질문이 오지 않자 결국 오늘 벌어질 멋진 계획에 대해 스스로 입을 열었다.

 

 “전! 오늘 리사를 도와줄 거예요.”

 “와, 정말 어른스러운데. 창고에 아마 오늘 새 보급품이 들어온댔지?”

 “맞아요. 거기에 사탕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카스티엘은 긍정의 뜻을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누가 저 예쁜 아이를 위해 찾아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보급품 담당이 누구였더라? 카스티엘은 어쩌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물론 카스티엘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있지도 않은 기억이 생각나는 것보다 엘리가 창고에 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아. 이건 카스티엘 거!”

 

 힘이 들지 않도록 조금 전에 흙바닥으로 다리를 뻗은 카스티엘의 발끝에서 정확히 한 발자국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몸을 기울여 줍고 보니 벌써 어느새 엘리는 창고 쪽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 멀리서도 여전히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하나밖에 못 찾은 거 주는 거니까 잃어버리지 말아요!”

 “이게 뭔데?”

 “부적! 꼭 잘 다녀와요!”

 

 엘리는 뒤를 돌아보느라 몇 번 기우뚱거리면서도 용케 계속 달려 곧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주운 것은 풀꽃으로 엮은 반지였다. 카스티엘은 아주 작게 미소만 지었다. 손바닥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려지던 반지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겨우 들어갈 크기였다.

 

 

 

-

 

 

 

 총격 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다. 손전등이 나무 사이로 번쩍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줍기를 반복해 불빛이 이리저리 나타났다 사라졌다. 제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인간의 피는 아니었다. 바로 앞에 있던 크로츠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며 터져 나온 뜨거운 것이었다. 카스티엘은 총을 들지 않은 오른손 소매로 얼굴을 훔쳐 닦았다. 눈이 따끔거려 바로 앞의 형체도 분간할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옆에선 또 한 번 총성이 울려 퍼졌다. 뭐가 있는지 시야에 집중하기도 전에 갑자기 등이 앞으로 속절없이 꼬꾸라졌다. 발에 차이든 뭔가에 맞았든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겨우 호흡하는 와중에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대로 물리면 여지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잘 다녀와요!’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었던 반지는 이미 뜯겨나간 지 오래였다. 남은 건 그 약속 같은 목소리뿐이었다. 카스티엘은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돌려 총을 바로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기괴한 소리를 낸 크로츠는 총알이 얼굴 옆을 비껴갔는지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바로 전에 괴이하게 꺾인 왼쪽 다리가 뒷걸음질 사이로 질질 끌렸다. 흙이며 돌멩이에 쓸려 손바닥에는 핏방울이 가득 맺혔다. 한 발을 더 쐈다. 이번에도 잘못 맞아 크로츠의 왼쪽 팔이 뚫렸다. 겨우 상체를 지탱하던 팔이 더는 버거운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등 뒤에는 나무 대신 큰 비탈 아래로 구덩이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새도 없이 크로츠가 총 아래를 잡고 달려들었다. 카스티엘이 비탈 옆을 더듬거릴 때였다. 순간 중심이 무너지고 시야가 뒤바뀌었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겨 총에서 나간 총알이 머리를 뚫었다. 달려들던 그대로 몸을 덮친 크로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곧 두 몸이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땅에 몸이 있는 대로 처박히면서 우둑, 하는 소리가 났다. 구덩이 위도, 눈에 닿는 아래도 어두웠다. 몸을 일으켜 같이 떨어진 크로츠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는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 한쪽은 기어이 완전히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지지 않고 아직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정상인 건 머리통뿐이었다. 온갖 것에 쓸리고 부러진 몸이 느끼는 걷잡을 수 없는 통증을 견디는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카스티엘은 아무것도 안 해요?’

 

 웃기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때 들었던 말이 카스티엘의 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카스티엘은 힘을 줘 손가락 끝만 겨우 한 번 움직여봤다.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는 이제 뭐든 안 하는 게 아닌,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는 당장 캠프로 날아갈 수도 없었고, 구덩이 아래에 갇히다시피 한 마당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유해줄 수도 없었다. 굳이 셀 필요도 없는 몇 세기동안 당연하게 해왔던 것을 조금 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이젠 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인간의 능력 이상을 가지고 할 수 있던 것을 가늠하던 때는 이미 지나있었다. 복종하며 살아오던 그는 이제 명령도 아닌 고작 약속 같은 말에나 기대서야 행동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카스티엘은, 모든 행동의 결과를 새삼스럽게 인간으로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갑자기 숨이 막혀 제대로 호흡할 수 없었다. 뒤늦게 충격을 받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추락에 끝에서 주어진, 아무런 의무 없이, 아무 대가 없는 자유는 그에게 너무 버거웠다. 복종도 없이 죽음까지도 본인의 의지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새삼스럽게 큰 충격이 되었다.

카스티엘은 인간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바로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진정으로, 새삼스럽게 카스티엘은 인간의 숨 막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정말이지, 카스티엘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뼈저리게 느낀 순간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들리는 건 쇳소리 같은 흐느낌뿐이었지만 카스티엘은 웃었다. 여전히 눈앞은 어두웠고 저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구덩이 속에 빠졌다는 걸 알릴 힘도 없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그냥 자신이 너무도 우스웠다.

 

 마구잡이로 들렸던 총성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직 울리는 귀는 이내 아주 작게 사람들의 목소리 같은 걸 들었다. 금방 위에 작은 빛이 모여들었다. 어떻게든 손전등을 가진 생존자들이 자신을 찾아낸 것일 거다. 구덩이 바로 앞에서 서성이는 탓에 눈가로 흙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불빛은 점점 더 많아졌다. 카스티엘은 이제 더는 웃지 않았다. 대신 내내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그가 의지대로 한 행동은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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