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과 딘의 집을 오랜만에 방문한 캐롤린은 몇 번이고 초인종을 눌러댔다. 곧 열린 현관문으로 문 만큼이나 커다란 샘이 고개를 내밀었다. 캐롤린은 천장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들어 샘과 눈을 마주쳤다. 샘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모.”
“샘, 넌 볼 때마다 커지는구나.”
샘은 캐롤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고 캐롤린은 빙긋 웃으며 샘의 뒤를 따랐다. 제집처럼 소파에 앉은 캐롤린의 앞으로 샘이 커피를 한 잔 내왔다.
“집은 시커먼 남자 둘 사는 것답지 않게 여전히 깔끔하네.”
“이모 집보단 깨끗하죠.”
캐롤린은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커피잔을 들었다.
“딘은 출근했니?”
“네.”
캐롤린의 맞은편에 앉은 샘은 딱히 말이 없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샘의 안색을 살피던 캐롤린이 조용히 물었다.
“대학 합격했다면서?”
“그…… 딘한테 들으셨어요?”
“그래.”
“……”
“등록해야지.”
샘은 머뭇머뭇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저도 빨리 취업해서 돈 벌어야죠.”
“왜? 딘이 너한테 돈 벌어오래?”
“아뇨!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알지, 그런데 넌 왜 대학을 안 가겠다는 건데?”
캐롤린의 눈을 피하는 샘은 이미 훌륭하게 자란 청년이었다. 예민한 인상에 잘 어울리는 눈썹 뼈와 뾰족한 코끝, 큰 키와 그 키에 어울리는 넓은 어깨는 부모를 잃고 움츠러들어 있던 소년의 모습을 흔적으로도 찾기 힘들었다.
“딘은 저 때문에 고등학교도 중퇴했어요.”
딘은 부모를 잃은 충격과 샘의 양육권에 관련된 소송 때문에 결국 고등학교 졸업을 포기했다. 샘은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쓰였다.
“그래서 뭐, 너도 대학에 안 가겠다고? 샘, 그런 말을 들으면 딘이 기뻐할 것 같니? 내 생각엔 화를 낼 것 같은데.”
캐롤린은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가벼운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 샘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 돈은 딘의 부모님-, 저희 부모님의 목숨 값이에요. 애덤도 그렇고요.”
“그럼 그분들이 네가 그 돈을 은행에 묻어두면 기뻐하실 것 같니? 샘, 네가 착한 애인 건 알지만 이건 아니야.”
캐롤린의 상식적이고 냉정한 반응에 샘이 특유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했다. 장성한 청년임에도 샘의 그런 표정은 여전히 효과가 있었다. 캐롤린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등록 기간 지나기 전에 꼭 대학 등록해라. 아니면 딘한테 말할 거야.”
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요?”
“뭔지 알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너 딘 좋아하잖아.”
“이모……”
“네가 딘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딘 하나뿐일 거야.”
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캐롤린은 쓰게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샘, 대학에 가렴. 그리고 딘에게 고백해.”
캐롤린은 샘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주고 샘과 딘의 집을 나섰다.
캐롤린이 떠난 이후 샘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집 안을 맴돌았다. 캐롤린이 알고 있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숨기고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산 지옥에 홀로 서 있던 샘을 구해주기 훨씬 전부터, 딘은 샘에게 있어 동경과 열망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흘러 키는 딘보다 커졌고 누구나 미소를 지어주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지만, 딘을 생각할 때면 샘은 중학교에 막 들어간 어린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샘을 가장 비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설마 딘도 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었다. 딘은 어쩌면 샘의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게 아닐까? 왜냐면- 그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샘의 보호자가 된 후, 딘은 세상에 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처럼 살았다. 친구도 따로 만나지 않고 여자와 깊은 관계도 만들지 않았다. 샘은 때때로 그것을 자기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했지만 그 착각을 정말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캐롤린이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자꾸만 돌아왔다. 샘은 딘이 돌아올 때까지 겁먹은 짐승처럼 거실을 배회했다.
딘이 마침내 퇴근했을 때, 샘은 여전히 거실에 있었다. 청바지에 편한 복장을 하고 손에는 음식 봉투까지 들려있었지만 딘은 여전히, 여전히……
음식 냄새 사이로 은근히 흘러드는 딘의 향기에 샘이 초조한 마른침을 삼켰다. 오메가처럼 달콤하지는 않아도 샘에게는 그 어떤 오메가 향보다 목마른 향기였다. 그런 샘을 아는지 모르는지 딘은 밖에서 사온 저녁거리를 슬쩍 들어 보이며 샘에게 고갯짓을 했다.
“집에 있었네?”
“응.”
“캐롤린 왔다 갔어?”
“응.”
딘이 힐끗 샘의 눈치를 봤다. 샘은 그들이 어젯밤에 다퉜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불편해하는 것이 역력한 샘의 낯빛에 딘은 모르는 척 음식 포장을 풀었다.
“배 안 고파? 먹자.”
샘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봤다. 그들의 부모가 살아있을 때 하곤 했던 일은 이제 무언의 약속으로 지켜지는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채널을 돌리던 딘이 지나가던 말처럼 물었다.
“캐롤린이 뭐라디?”
샘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딘은 더 기다려주지 않고 샘의 팔을 꾹꾹 찌르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하지 마.”
딘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던 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되려 조심스럽게 딘의 팔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딘의 팔 안쪽까지 감겼다. 딘은 괜한 소리를 하며 투덜거렸다.
“너 지금 알파라고 유세떠냐? 기껏 키워놨더니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샘은 간신히 밝은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래서 이제 날 안 귀여워해 주는 거야? 귀염성이 없어서?”
“응 맞아. 그리고 거기 멀대 같은 누구 씨가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화낸 적도 몇 번 있지 않았냐?”
“그건 형 인생도 좀 챙기라는 뜻이었지 날 귀여워하지 말란 말이 아니었어.”
딘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제는 자기보다 반 뼘은 더 큰 동생을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 뭐… 뭘 바라는 건대?”
순간 샘이 딘의 팔뚝을 붙든 손을 자기 쪽으로 당기며 상체를 딘 쪽으로 숙였다. 샘은 커다란 알파였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도 딘은 샘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숨을 쉬어야만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샘의 떨리는 숨이 딘의 눈가를 스쳤다. 두 사람 사이의 열은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샘이 다시 입을 열기 전, 딘이 턱 하니 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뭐, 왜?”
커다란 개라도 쓰다듬듯 거칠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당황한 샘이 고개를 저었지만 딘은 샘을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귀여워해 달라며.”
“뭐? 아니 난……”
샘은 결국 딘을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다 알고 이러는 걸지도 몰라. 명치 근처가 욱신욱신 쑤셨다. 샘은 체념 섞인 한숨을 쉬며 상체로 딘을 깔아뭉갰다. 딘은 웃으면서도 샘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심술을 담아 체중으로 딘을 맘껏 누른 샘이 한참 후에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그때 생각난다.”
“그때가 언제야?”
“비행기사고 나기 며칠 전.”
딘이 그 큰 눈을 끔벅거렸다.
“그때 너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어.”
“그래?”
딘은 대수롭지 않게 샘의 말을 받아넘겼다. 아슬아슬하게 딘을 포기하는 일에는 샘도 이제 이골이 나 있었다. 샘은 제 마음은 물론 딘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딘에게 몸을 기댔다. 딘도 아무런 말 없이 샘의 체중과 체온을 받아들였다.
겨우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좀 전의 긴장은 온데간데없이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자세를 바꿨다. 딘의 미지근한 티셔츠를 만지작대던 샘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형은, 형도 알파는 오메가랑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어디서 그런 질문이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솔직히 그래.”
딘의 대답에 샘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왜? 형 부모님도 알파랑 베타셨잖아.”
한숨과 함께 말을 망설이던 딘은 결국 대답을 해줬다.
“네가 기억할 때쯤엔 좀 나아졌지만…… 두 분 사이가 늘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어. 네가 태어나기 전엔 더 심했고.”
“난 형 부모님이 완벽한 한 쌍인 줄 알았어.”
“난 너희 부모님이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이쪽도 그래.”
둘은 작게 웃었다. 딘이 샘의 머리칼을 길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파랑 오메가라고 해서 무조건 행복해진다기보다는, 행복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고 생각해. 요즘 세상에 그것만 해도 어딘데.”
샘이 갑자기 딘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숨길 수 없는 열이 샘의 눈동자 안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그래도, 만약 알파가 오메가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게 오메가가 아니라면?”
딘은 말없이 샘과 눈을 마주쳤다. 언젠가부터 샘을 바라보는 딘의 눈에는 슬픔이 엷은 장막처럼 드리워있어서, 샘은 그 밑에 숨겨진 딘의 진심을 읽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다. 딘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입을 뗐다.
“샘, 대학에 가.”
“딘..!”
알파 특유의 묵직함을 담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샘은 간절히 딘과 눈을 마주쳤지만 딘은 빈틈없이 닫힌 책처럼 이미 표정을 굳힌 뒤였다.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입만 달싹이던 샘은 결국 자세를 고쳐 앉고 딘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그게…….. 정말 형이 원하는 거야? 내가 대학에 가는 거?”
“그래.”
딘의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대답에 샘은 한숨을 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명문대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학 대부분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던 샘은 다음 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에 입학 신청서를 냈다.
그 후로 샘과 딘의 삶은 예전의 박자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딘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집을 떠나지 않는 샘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긴 했어도 딱히 뭔가 말을 얹지는 않았다. 샘은 은밀히 기뻐하는 딘을 아무런 내색 없이 눈으로 좇았다.
익숙한 흐름을 타고 시간은 손쉽게 흘렀다. 하루, 이틀, 가볍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인 시간의 무게는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게 여길만한 착각을 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올 미래를 바꿀 수는 없었다.
샘은 대학에서 꽤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알파임을 사방에 드러내는 큰 키와 멋진 골격에 시선을 돌렸다가 샘의 세심하고 영리한 눈동자에 마음까지 빼앗기곤 했다. 오메가는 물론 베타까지도 샘을 눈여겨봤고 알파들도 조용하고 겸손한 샘을 업신여기지 못했다.
볼품없이 마른 어린애에서 듬직한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샘은 자신이 변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알파로 발현한 이후 세상이 그에게 조금 더 친절해진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샘은 스스로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샘에게 골목길 끝에서 폭행당하고 있던 오메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것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봐!”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어두운 골목길은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그렇게 외딴곳도 아니었다. 알파임을 확연히 드러낸 샘의 목소리에 오메가 하나를 붙잡고 있던 두 알파가 동시에 샘을 돌아봤다.
“신경 끄고 네 갈 길이나 가.”
샘은 대꾸하는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버튼을 눌러댔다. 알파 중 하나가 황급히 샘에게 다가왔다.
“대체 뭘 찍는…… 억!”
샘은 가까워진 알파의 얼굴을 냉큼 후려쳤다. 오메가를 붙잡고 있던 알파가 뒤늦게 달려왔지만 결국 제 친구와 같은 신세가 되어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두 알파는 가만 안 두겠다는 식의 욕설을 지껄이며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샘은 골목길 안쪽에 쓰러진 오메가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바닥에서 뒹군 탓에 오메가의 몰골은 엉망이었고 무엇보다 그에게서는 히트 사이클이 터진 오메가 특유의 숨 막히는 단내가 났다. 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오지 마!”
오메가가 뒤로 기며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진정해요. 나는, 그럴 생각 없으니까 도망치지 마세요.”
오메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샘을 올려봤다. 잠시 망설이던 샘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일어설 수 있죠? 경찰서에 데려다 줄게요.”
알파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바닥에 쓰러진 오메가는 다리도 잘 가누지 못했다. 샘은 휘청이는 오메가를 부축하고 더러운 골목길을 나섰다.
오메가는 샘의 도움으로 경찰서에 무사히 도착했다. 히트 억제제를 맞은 오메가는 보호자를 기다리며 경찰서 한구석에 몸을 기댔다.
“고마워요.”
샘은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고맙다는 말에 과묵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지친 오메가는 약기운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경찰관 하나가 안색이 나쁜 샘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메가를 데려오다니 자제력이 대단하군요. 그래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오메가 페로몬에 많이 노출됐으니까요.”
샘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저었다.
“집에 약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빨리 들어가 보세요. 조심하시고요.”
샘은 경찰관에서 인사를 하고 경찰서를 떠났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오메가를 지켜야 한다는 긴장감이 풀려서 있지 샘의 몸은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아.’
샘은 옷에 남아있을 오메가의 페로몬을 털어내려고 애쓰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고, 그리고-, 샘은 어떻게 인지도 모르게 집에 도착해 자기 방까지 비틀대며 걸었다. 부자연스럽고 강렬한 열에 구토감이 들 정도였다. 샘은 결국 제 방에 발을 디디자마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뜨거워, 더워, 괴로워
독한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오르고 머리가 어질했다. 촉촉하게 땀이 배어난 샘의 목은 옷자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메가 페로몬에 억지로 끌려 나온 알파의 발정기는 여느 때보다 격렬하고 괴로웠다. 샘은 침대 옆 서랍으로 기다시피 다가갔다.
서랍을 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 몰랐다. 샘은 겨우 서랍을 열고 손에 약병을 쥐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덜덜 떨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은, 어린아이가 열 수 없도록 처리된 약병 뚜껑을 열기에 역부족이었다. 열리지 않는 약 뚜껑과 한참을 씨름하던 샘의 귀로 너무나도 두려운 소리가 들렸다.
“샘?”
약병에 애처로이 매달려 있던 긴 손가락이 덜컥 멈췄다. 샘의 모든 신경이, 눈과 귀와 코와 입과 그 모든 것이 집에 돌아온 딘을 향해 쏠리기 시작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딘의 목소리는 겁이 날 정도로 달았다. 딘이 집안을 두리번거리는 발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이던 샘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약병을 비틀어 열기 시작했다. 약병이 열린 것과 딘이 샘의 방 문 앞에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새미?”
딘.
차르르 소리와 함께 샘의 손바닥 위로 큼지막한 알약들이 떨어졌다. 유령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를 쳐다보는 샘의 눈빛에 딘이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딘은 샘이 바닥에 쓰러져 약병을 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만약 딘이 오메가거나 혹은 알파였다면 샘의 냄새를 맡고 그 자리를 즉시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딘은 베타였고 샘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위험한 향기를 풍기는지 알지 못했다. 딘이 망설이는 사이 딘의 체취가 공기 중으로 퍼져 서서히 샘을 감쌌다. 샘은 이제 입까지 벌린 채 숨을 허덕였다.
“…딘…”
“샘..? 괜찮아?”
샘의 떨리는 손 안에서 호르몬 억제제가 잘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샘은 밭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순간부터 자신이 열망했던 단 하나의 존재.
“새미?”
샘의 손가락 사이로 노란 알약들이 구슬처럼 주르르 흘러내렸다.
딘은 샘이 약을 떨어트리는 것과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샘이 두 사람의 발끝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다가왔을 때, 딘은 샘의 몸에서 일렁이는 열을 뺨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샘 너, 괜찮아?”
딘은 샘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열을 담고 딘의 어깨를 양쪽에서 쥐어왔다.
“딘……”
십 년 가까이 숨겨왔던 감정은 무너져버린 둑처럼, 넘쳐버린 물처럼 흘러내렸다. 몸에서 느껴지는 열은 샘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열기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딘은 조심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샘은 놓아주지 않았다.
“샘 너, 어쩌다가 이렇게…… 병원에 가자. 아님 좀 눕던지…”
“형……”
샘의 코끝이 딘의 뺨을 스치듯 다가왔다.
“형 제발……”
샘이 양손으로 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딘의 이마에 닿는 샘의 이마가 고통스러운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뜨거웠다.
“제발제발제발……”
“샘……”
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뒤로 뺐다. 딘이 샘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붙잡았다.
“샘, 이러면, 안 돼.”
“왜, 왜 안 되는데?”
입맞춤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젓는 딘도 샘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넌 이러면 안 돼. 넌 내가 아니라 좋은 오메가를 만나서……”
“오메가는 필요 없어!”
샘이 처음으로 짧게나마 화를 냈다. 샘은 열 오른 손으로 딘의 양 뺨을 쓰다듬으며 딘과 이마를 마주쳤다.
“형 아닌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샘은 언제나 딘의 심장을 녹이는 방법을 알았다. 딘은 샘을 외면하려 애써봤지만 딘의 가슴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욱신거렸다. 이런 게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딘은 생각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서로를 대신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면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면.’
딘은 발정기의 열에 고통스러워하는 샘과 조심스레 눈을 마주쳤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그거야?”
“……내가 원하는 건 형이야.”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문 딘은 지금까지 피했던 샘의 입술 위로 천천히 입을 맞췄다. 샘의 입술은 믿기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딘은 갑자기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선 샘 때문에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형 입술……. 나는……”
샘의 시선은 타는 듯 뜨거웠지만 딘을 놓아준 손은 볼품없이 흔들렸다.
“형 나한테 장난치면… 안 돼, 난, 더는 못 참아.”
“참지 마.”
딘이 샘이 물러선 만큼 샘에게 더 다가갔다.
“참지 마.”
딘의 말에 샘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찰나의 망설임 후, 샘은 곧바로 딘을 붙들고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딘은 양팔로 샘을 끌어안았다. 샘은 그 동안 딘이 입을 맞췄던 그 누구보다 컸으며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뜨거웠다. 딘은 순간 샘의 열에 갇힌듯한 착각이 들었다. 딘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옅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샘의 인내심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길고 뜨겁고 무겁고……
“대단하다 너.”
긴 밤을 보낸 딘은 침대에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일어서는 게 문제일까, 딘은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딘의 몸을 닦아주던 샘은 발정기의 열이 올랐을 때만큼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샘은 딘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가 딘에게 남긴 흔적을 은근히 쓰다듬었다. 오메가만큼 흔적을 남길 수는 없지만 만족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행복이라는 것이 심장에 쌓이는 재화였다면 샘의 심장은 이미 터져버렸을 것이다.
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얼굴을 한 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딘이 샘에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아?”
“뭐?”
딘은 대답 없이 샘의 얼굴을 살필 뿐이었다. 어떤 분노와 슬픔이 샘을 꽉 옥죄었다. 온몸 가득하던 행복이 공기 중으로 조금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샘은 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딘이 마음을 열어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다른 것은 나중에 걱정해도 될 일이었다. 샘은 짐짓 화라도 낼 것처럼 엄한 목소리를 냈다.
“딘 윈체스터,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얼토당토않은 알파 행세에 딘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알겠다 알겠어. 다음 발정기에도 그런 소릴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
샘은 작게 웃으며 수건을 챙겨 침대에서 일어섰다. 수년간 발정기를 겪었지만 샘은 그 어떤 오메가도 안지 않았다. 샘의 고통스러운 발정기를 함께 해줬던 것은 몇 알의 호르몬 억제제와 다른 누구도 아닌 상상 속 딘이었다.
“그래. 진짜 발정기를 기대해.”
샘의 위풍당당한 말에 딘이 긴 한숨을 쉬며 침대에 파묻히듯 몸을 뉘었다. 편한 자세로 구경하는 샘의 단단한 등은 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눈요기였다. 샘이 움직이는 대로 꿈틀대는 근육을 멍하니 관찰하던 딘은 문득 샘의 척추 쪽에 있는 자국에 눈이 갔다.
“너 등에 그거 뭐야? 다친 적 있어? 내가 왜 몰랐지?”
딘의 물음에 샘이 어깨너머로 제 등을 살폈다.
“이거? 나도 모르겠어. 어렸을 땐 없었는데 키가 갑자기 크면서 생겼던 것 같아. 나이가 먹을수록 진해지더라.”
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신기하네. 내가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우리 아버지도……”
별안간 딘이 말을 멈췄다. 수건을 밖에 내놓느라 잠깐 딘의 말은 듣지 못한 샘이 다시 방에 돌아와 물었다.
“뭐?”
딘은 좀처럼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샘을 쳐다봤다. 샘은 딘이 눈으로 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는 것을 느꼈지만 그 시선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딘의 뺨이 유령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창백했다.
“왜 그래?”
불안함이 섞인 샘의 목소리에 딘이 황급히 표정을 바꿨다. 딘은 대답 대신 더듬더듬 베개를 집어 제 옆에 샘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졸리지? 빨리 자자.”
샘은 고개를 갸웃하긴 했어도 딘의 옆에 눕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방에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의 체온이 함께 덮은 이불 밑으로 섞이자 샘은 또다시 벅찬 마음에 단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잠들지 않은 샘의 소리를 들은 딘이 어쩐지 연약하게만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행복하니?”
샘은 자신의 행복을 자꾸만 되묻는 딘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샘은 조심스럽게 딘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응, 행복해.”
딘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고민한 샘은 딘을 보채는 대신 소중히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딘은 샘을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팔을 둘러 샘을 안아주지도 않았다.
샘이 잠들고도 샘의 대답을 한참이나 곱씹던 딘은 샘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제 눈을 가렸다. 딘을 지켜보는 이는 짙은 밤의 어둠뿐이었다.
여교황 - 비밀
The End





